요즘 말하는 욜로(YOLO) 에 가까운 삶을 사는 친구가 있다. 일단 불안한 계약직인데다 계약 텀도 굉장히 짧은 직종에 근무한다. 그런데도 잘 놀러 다닌다. 너무나도. 그러면서 늘 걱정을 늘어놓는다.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야지, 정규직도 되면 좋겠지, 계속 놀러 다니고는 싶지…
이런, 쓰고 보니 이 친구는 욜로가 아니다. 내일 살 걱정을 하기는 하니까. 아무튼, 이 친구의 문제는 뭘까, 혹시 쾌락의 끝자락에서 내려오기 싫은 발버둥을 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더 큰 것을 가질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낀 걸까.
술을 마시던 게임을 하던, 그 때만 즐거을 뿐이다. 숙취에 고통받을 때, 게임 종료 버튼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다시 비어있음을 느낀다. 쾌락의 순간에는 더 큰 역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며 파열을 발생시키는 게 아닐까. 그것이 허무감인지, 어떤건지 잘 모르겠다.
더 큰 보상을 바라는 뇌의 요구와, 중독적인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배제시키는 습관의 힘이 합쳐진 것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한다. 올바른 (적어도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성취’의 대부분은, 즉각적인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벌이 바로 튀어나오는 행위에 우리는 열광한다. 시간을 들여 보상이 주어지는 성취에 점점 관심을 잃는 것이다. 하는 방법도, 버틸 힘도 잃어버린다.
습관은 더 무서운데, 뇌의 보상기제가 작동하건 말건 이 녀석은 항상 LRU (Least Recently Used) 리스트처럼 행위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자주 한 일일수록 쉽게 선택되고, 전혀 해보지 않은 일 (하지만 한번 쯤 해봐야지 하며 버킷리스트에 채워넣었던 일) 은 선택되기 힘들게 한다. 즉, 새로운 도전은 그만큼의 비용이 들지만, 곁에 둔 습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복적인 행동은, 그것이 나쁘건 좋건 간에, 여유 시간에 ‘그냥 할 만한 것들’의 유력한 후보로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 후보는 2선, 3선을 밥먹듯이 할테고, 질 나쁜 행동이 고착화되면 언젠가는 부패할 것이다.
잘못된 습관과 보상기제로 인해 정해진 중독적 행위가 과연 현재를 즐기자라는 다소 낙관적인 말로만 포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됐다는 말을 쓰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뭔가 내가 하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잘못된 거다. 애석하게도.)
소미의 옆집 아저씨도 ‘오늘만 산다’고 말하지만, 욜로라고 하지 않는다. 다음을 걱정을 하는 자에게, 중독을 이어가는 이 허무함은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이 신조어는,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허무감을 회피하지 못한 비웃음의 단어는 아닌지, 아니면 정말 해탈했다고 자랑하고 싶은건지 의심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