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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아야 다 좋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어야 하는 법

Ende gut, alles gut

‘버번 위스키의 모든 것’ 읽다가 독일 속담을 발견했다. 저자가 와일드 터키 증류소의 마지막 투어 코스인 시음장 (테이스팅 룸) 에 들어서면서, 모든 증류소 프로그램의 마지막인 이 곳이 전체 인상을 좌우한다 는 말 바로 다음에 말이다. 국내외 맥주나 소주 공장 투어를 몇번 가 봤는데, 하나같이 마지막 코스를 제일 공들인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 역시 공감이 되었다.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와일드 터키 테이스팅 룸 입구 (출처: 와일드 터키 홈페이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와일드 터키 테이스팅 룸 입구 (출처: 와일드 터키 홈페이지)

술 이야기를 하려고 꺼낸 것은 아니다. 저 속담이 내 어딘가를 쿡쿡 찔렀기 때문이다.

잘 끝내야 한다는 강박

나는 시작을 호기롭게 하는 편이다. 소심한 나에게 도움을 주셨던 은사님들께서 늘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

일단 해 보고, 증명하라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들이대, 저질러학과, 뒷수습전공’ 이 생각난다. 이건 따로 글을 정리해 보곘다.)

나도 엄청 소심한 사람이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먼저 손을 들고 해보는 것이 전부 두렵다. 그런데 질끈 눈을 감고 해보고 나니, 잘 하면 칭찬받고 못 하더라도 시도는 좋았다라고 해주더라.

일단 하는게 본전이라는 것을 체득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소개할 때, 끝 마무리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하면 더 심해져서, 정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려온 적도 있다. 처음에 가졌던 자신감을 다 흘려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렇고 듣는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끝맺음이 반드시 좋아야 한다’ 는 강박이 생겼다.


그래서 (예정된 발표를 하는 자리라면 더욱) 마지막 부분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는데, 이게 오히려 역호과를 내기도 했다. 백여명의 외부 청중을 모시고 하는 발표 자리였는데, 마지막 슬라이드를 어떻게 맺을까 하다가 사자성어를 하나 골라 쓴 기억이 있다. 그 때 힙해보이고 싶었는지,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성어를 가져오고 싶었나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발표 내용은 잘 기억 못하고 그 네글자가 대체 뭐냐 는 피드백을 한동안 받았다.

그 사자성어가 뭐였냐고?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지 마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지만 말하기 부끄럽다.

화룡점정 (畵龍點睛) 의 조건: 과정

이미 아주 좋은 것에 마지막 한 방을 넣어 완성한다는 것은, ‘좋은 끝’ 을 떠올릴 때 쉽게 따라나오는 사자성어 일테다. 하지만 화룡점정의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로운데, 첫 번째는 일단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정이 또한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실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정을 잘 해내기가 어려워 시작도 안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두 번째 역시 쉽지 않다. 끈기와 실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작은 해 두고, 과정은 제껴둔 채 용의 눈만 그려넣는데 혈안이 된다면? 아예 사람들이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시작하는 것은 용기이겠지만, 진행하고 맺는 것에 순서가 있다면 먼저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과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좋은 결말’ 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나의 발표 에피소드처럼) ‘튀는 결말’ 로 기억되거나, 아예 전체가 잊혀질 것이다.

그리다 만 그림에 얼굴 잘 그려봐야… (출처: Unsplash Mick Haupt)

그리다 만 그림에 얼굴 잘 그려봐야… (출처: Unsplash Mick Haupt)

알수 없는 거대한 끝을 향해

갑자기 엄숙한 주제를 꺼내는 것 같지만, 이 또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짧게 남긴다.

게임 오브라 딘 호의 귀환 에서 처음 접했던 격언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는 뜻이다.

이 말은 원래 인생에서 업적을 남기고 우쭐대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겸손하란 거다.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대충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조금 다르게도 해석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생을 충실히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잘 끝내는 법’ 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 만화 작가가 있다. 기발한 재치로 삶에 통찰을 안겨주는 ‘요시타케 신스케’ 의 메멘과 모리 에도, 모든 것에 끝이 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메멘과 모리 책 표지. 둘은 남매다

메멘과 모리 책 표지. 둘은 남매다

잘 끝내자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가 마주한 거대하고도 허무한 그 끝에서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화책이기 때문에 재밌게 볼 수 있지만, 곱씹어 볼 만한 좋은 책이다.


다시, 우리는 ‘좋은 끝’ 을 맺기 위해 ‘좋은 과정’ 이 필요하다.

일도, 삶도 말이다. 그래야 다 좋다 (alles gut).

😉
이 포스팅의 대표 이미지는 Unsplash 에서 찾은 Sydney Rae 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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