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조승원 기자가 쓴 버번 위스키 책. 도입부를 읽어보니, 위스키 관련된 책을 이미 두 권이나 앞서 펴냈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두 권의 위스키 책을 읽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앞서 읽은 책들이 확실히 번역된 책들이라 이해하는게 어려웠다. 위스키 마스터 클래스나, 죽기 전에 마셔봐야 할 101가지 위스키 같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어서인지, 이 책은 상대적으로 친절해 보였다. 특히나 에세이 느낌이 강해서 [[나의 파란, 나폴리]] 느낌도 났고.
버번이란 무엇인가
초반 ‘버번 위스키 설명서’ 는 매우 친절하다. 내게는 딱 두 가지 구절이 떠오르는데,
증류기에서 알코올 도수 60퍼센트로 위스키 원액을 뽑아내서 속을 태운 간이 오크통에 잠깐만 넣었다가 빼서 깔때기로 병에 담으면, 버번은 완성된다. - 지미 러셀 (와일드 터키 증류소 마스터 디스틸러)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초간단 버번 위스키 제조법. 미국에서 각 단계별 도수 조건을 만족하려면 증류 원액이 60도면 충분하고, 새로운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것만 지키면 된다. 하지만 오크통 숙성 기간엔 제한이 없다는 사실. (그렇다고 정말 잠깐만 넣었다간, 보드카인지 뭔지 모를 듯..)
알코올은 효모가 당분을 먹어치우면서 생긴다.
- 곡물 (옥수수나 호밀 등)에는 당분이 없으니, 맥아를 넣어 당화를 하고
- 당분이 만들어지면 효모를 넣어 발효를 하고
- 도수 높은 알코올을 걸러내기 위해 증류해 낸 뒤
자비르 이븐 하이얀의 자비를 받아서 - 오크통에 숙성하고 기다린 다음
- 병입해서 판매한다.
참 쉽죠?
켄터키 관광 안내서? 역사서?
나는 버번 3대장이 무엇인지, 짐빔과 잭다니엘이 다른 이유 정도만 알고 있었지, 켄터키가 경마로 유명한 사실이나, 켄터키의 증류소가 어느 지역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버번 증류소 탐방기를 겸한 켄터키 관광 안내서로 봐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크게 켄터키 주에 위치한 증류소를 바즈타운/루이빌/그 외 지역으로 나눠 소개하고, 마지막 테네시 주의 잭다니엘 증류소로 마무리한다. 바즈타운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 중 하나로 꼽힌 바즈타운에서 버번 트레일이 시작했고, 켄터키 더비가 열리는 대도시 루이빌을 지나, 프랭크포트, 로렌스버그, 렉싱턴에 있는 증류소를 차례로 소개받으니 버번 위스키 발전사를 따라가는 느낌마저 든다.

2012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던 바즈타운 (출처: 미국관광청)
왜 이 도시에서 버번 위스키가 유행했는지, 버번은 대체 켄터키 사람들에게 뭐였는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 살았던 사람들, 특히 버번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유명 인사들 역시 대부분의 증류소에도 족적을 남겼기에, 그들의 소개도 빠짐없이 한다. 이쯤 되면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증류소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켄터키 풍경을 고스란히 담으려 노력했다. 우드포드 리저브 증류소로 가는 길이 너무 예뻐서 차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던가, 아래처럼 켄터키의 가을을 맞이하는 대목이라던가.
아침에 눈뜰 때까지도 그저 그랬다. 별다른 사고 없이 하룻밤 무사히 보낸 걸로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조금 뒤 반전이 일어났다. 답답한 암막 커튼을 젖혔을 때다. 그 순간, 켄터키의 11월이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늦가을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그 햇살에 반사돼 색색의 낙엽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 켄터키의 가을이구나!’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냉큼 뛰쳐나갔다. 밤엔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스산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나 정겹게 느껴지는지. 사람 마음이란 게 이토록 살살하다.
같으면서도 다른 위스키 만드는 법
당연히 그렇겠지만, 모든 증류소가 버번 위스키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가지고 있었다. 매시빌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공개를 안 하는 곳도 물론 있었다. 발효 시간이 다르거나, 발효통의 재질이 다르거나 (보통 구리를 쓰지만 나무를 쓰는 곳도 있다).
가장 차이를 많이 보이는 부분은 증류 방법이다. 두 번, 혹은 세 번에 걸쳐 증류하기도 하고 흔히 이야기하는 컬럼 스틸 (연속식 증류기) 가 아닌 스코틀랜드의 팟 스틸을 쓰는 곳도 있고. 컬럼 스틸의 모양도 제각각이고, 증류된 직후에 나오는 하얀 위스키 원액 (화이트 도그) 의 도수도 제각각이고..
숙성되는 오크통을 다루는 방식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 보통 숙성고는 7층으로 짓는데, 1층에서 7층까지의 환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주기적으로 위치를 바꿔주는 곳도 있고, 아예 온도 조절기로 환경을 통제하는 곳도 있고, 심지어는 비효율적이지만 확실하게 숙성고를 1층으로 지어버린 곳도 있다고. 땅부자 미국 ㅎㄷㄷ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피어리스 버번 (출처: Unsplash Daniel Norris)
왜 이 책은 이해가 잘 됐을까?
이런 위스키 용어들이 자체를, 앞선 두 책을 읽을 때는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스틸? 원액? 증류? 발효? 숙성?
아무래도 모든 위스키 (스카치/버번/일본/기타) 를 다루려다가 깊이가 떨어진 것도 있고, 다시 말하지만 번역체가 몰입을 방해해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정말 ‘버번’ 에만 집중한다. (가끔 스카치 용어로는 이렇게 부릅니다~ 언급만 한다) 게다가 증류소를 들를 때마다 발효-증류-숙성-병입-시음 (!) 을 반복적으로 소개해야 하니, 같은 용어가 또 나오고 또 나온다. 이런 부분이 마음에 쏙 들었다. 교과서같지 않은 교과서랄까. 한 때 압구정 일타강사를 하셨다는 작가님의 말이 허세가 아닌 것 같았다. 쓸데없이 외우지 마세요 이해하세요
나가는 말에는, 전설의 버번 ‘패피 밴 윙클’ 에 얽힌 존슨 가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아버지인 지미 존슨 시니어가 이 위스키를 어렵게 구해, 두 아들과 먹기로 했다. 막내 프레디 존슨에게 건넸더니, 귀한 술이라고 아껴먹어야 한다며 아주 찔끔씩 따랐더란다. 이 때 지미가 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귀하고 오래된 버번 위스키를 아껴둬선 안 돼. 친구나 가족과 함께 지금 바로 즐겨야 해..
혼술이 유행이라지만, 좋은 술은 좋은 사람들과 마셔야 한다는 것,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메시지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던 도중 후배에게 소개시켜줬더니 ‘형은 주락이월드 구독 안하세요? 거기 나오는 사람 같은데?’ 라고 했다. 찾아보니 정말이다. 게다가 이미 한 권을 더 썼다고! 정작 그가 진행하는 주락이월드보다, 침착맨과 위스키 특강한 두 개의 클립을 너무 재밌게 봤다. 생각보다 푸근한 인상의 아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