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측도와 무리수

‘알고리즘 산책’ 책 요약이다. 까먹지 않으려고 정리한다.

최대공측도는 최대공약수 같은 개념이다. 선분 A와 B가 특정한 길이로 측정이 가능할 때, 이 길이 중 가장 긴 길이를 최대공측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값을 구하는 코딩 역시 최대공약수 계산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공측도 값이 되는 선분 길이는 자연수이다.

그런데 19세기 조지 크리스털이 증명한 것은, 정사각형의 변과 대각선의 변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선분은 없다는 것이다. 왜일까? 귀류법을 통해, 정사각형의 변과 대각선의 변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선분이 있다고 가정하면 된단다. 여기 다 정리할 수는 없고 요약만 하자면,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선분으로 그린 정사각형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장 작은 정사각형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선분이 있다고 가정해버리면, 더 작은 정사각형을 그릴 수 있게 되므로 모순이다.

그래서 대각선은 유리수가 아니라는 단서가 되었고, 무리수 \sqrt{2} 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쁜 낙서장을 원했던 걸까

정갈한 한정식도 아니고, 욕쟁이 할머니가 내어 주는 재미있는 맛이 담긴 한 끼도 아니고, 그냥 쓱쓱 싹싹 콩나물과 보리밥에 눈물 참기름 한 방울, 매운 인생 맛 큰 숟갈 넣어 아구와구 비벼먹을 건데. 일기장은 이뻐봤자 나만 만족하는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게 중요하다고 보거든.

개인적인 이야기와 바깥의 이야기를 구분했으면 해서 만든 것이 블로그였는데, 이제는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 같다. 그 외줄타기를 잘 해야 내 아이덴티티가 쇼윈도에 걸리는 것이긴 하지만, 난 양산형 마네킹이 아니니까 으레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기괴한 포즈를 취할 수 있다. 혐오감을 줄 수도 있고, 저놈 저거 노력하네 같은 행인들의 빈말 몇 마디 정도는 듣겠지.

어릴 적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 반 친구들 몇몇이 우루루 와선 돌려보곤 했다. 별 것 없는 내용, 뻔한 전개지만 내 나름 가장 활발한 리뷰어 (Reviewer) 들이었노라고 자부할 수 있다. 칭찬과 비난이 뚜렷이 섞인 말들은 이내 비난도 지쳐버린 자들의 과거속으로 숨어버렸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내 글도 숨었다.

숨기 싫어서 나온건데, 아직도 예쁜 일기장을 고르려 핫트랙스를 기웃거리는 중학생의 심정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플랫폼은 뭘 하지? NAS 를 사서 내 개인 서버를 꾸며볼까? 책을 읽으려면 아이패드를 사야지? (글 쓰는데 왜 갑자기 아이패드야) 정신을 차려보니, 고민은 목적을 한참 벗어나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제 이런 고민 다 필요가 없다. 묵묵히 쓰는게 짱이다. 예쁜 낙서장은 이제 그만 골라야겠다.

더욱 오늘을 의미있게 살자

좌우명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곁에 두고 보는 말 같은 진부한 설명 대신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생각이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첫 번째 기준이나 신념을 말로 표현한 것’ 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살 수도 없고, 모든 것을 경험하며 살 수도 없다. 모든 것이라는 집합 자체가 유한하지 않은 것이 첫번째고, 우리의 생 또한 무한하지 않은 것이 그 다음이다.

그래서 내 좌우명은 무어냐고 또 물으신다면,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으레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 위인전에서 나온 명언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좌우명이라고 정하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내 좌우명도 ‘시간을 금 같이 보라’ 였다. 어, 이거 최영 장군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아무튼 난 이게 마음에 들었다. 시간은 소중히 써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저축할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나보다. 일기를 읽어보면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어떤 치기로 선택받은 이 좌우명에 기름칠을 조금 해서, 지금의 내 좌우명을 정해본다. ‘더욱 오늘을 의미있게 살자’. 너무 달라졌는데? 하지만 의미는 확실히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라는 단어는 단위로 설명할 수 없는 추상화된 개념이다. 시간을 소중히 써야 한다면, 특정 시간 단위를 집중해서 살자고 말하는게 더 설득력있어 보였다. 매 초 열심히 살자? 그렇다면 이미 성공한 횟수보다 실패한 횟수가 더 많다. 좌절 느끼기 딱 좋은 말이구만. 단위를 넓게 잡아 ‘하루’ 라고 지었다.

그냥 의미있게 살면 되지, 더욱은 뭘까. ‘어제의 나’를 통해 반성하고 칭찬하면서 ‘오늘의 나’를 더 의미있게 살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뜻이다. 이 말 대로 엄밀히 구분하자면, 어제와 오늘은 연속성이 없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끈 위에서는 모두 이어져있으니까. 그 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면 어제의 내가 했던 의미를 발전시켜 갈 수도 있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뜬금없지만, 영화 ‘아저씨’ 에서 차태식 대사 중 유명한 것이 있다. ‘너흰 내일만 보고 살지.. 난 오늘만 보고 살아..’ (뒷 말은 욕이니까 생략하고) 내일을 보고 사는 것은 오늘을 희생해서 내일의 불확실한 나에게 짐을 덜어주는 의미도 되겠지만, 오늘을 소비하고 내일의 나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이중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이뤄놓은 것에 대한 설명은 해 줄 수 있겠지만, (계획에 없는데 의도적으로) 내일 해야 할 일을 오늘 몰아 하는게 과연 맞는가? 신용 카드를 긁으면서 내일의 내가 좌절해 줄 거라고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게 과연 맞는가 말이다.

그래서, 미래의 내가 덜 부끄럽게 과거의 내가 제시한 방향이 헛되지 않게 오늘은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 의미가 뭐냐? 글쎄, 그건 매일 달라질 수 있겠다. 위기를 극복하고, 성취를 만끽하고, 사고에 대처하고,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슬퍼하고…

물론 의미없는 날을 보낼 수도 있다. 내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는 날이 있을 것이고, 아니 오히려 그런 날들이 한 해에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도 지켜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날까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 처럼 간주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도 그렇다.

 

덧. 이걸 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일기를 써야 한다. 무슨 내용이든 좋지만, 칭찬 6에 반성 3, 감상 1 정도의 비율로 적어주면 가장 좋다. 기분에 따라 감상 10이 될 수도 반성 10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적으면 나중에 읽을 때 좀 오글거리고 읽기 싫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