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구독을 자처하진 않았다. PS5 를 구매했더니 몇 개월, 카카오페이로 결재하는 조건으로 몇 개월 씩 무료로 받은 것 뿐이다. 하지만 그다지 볼 게 없었다. 그렇게 유명하다는 파친코 조차 중도 하차할 정도로, 드라마를 고르는 내 기준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커뮤니티에서 어떤 드라마의 1회분의 요약을 봤다. 어디서 볼 수 있냐는 댓글에 넌지시 애플TV 독점이라는 친절한 답글이 달려있었다. 아직 무료 구독일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브란스’ 를 보기 시작했다.
요약은 대강 이랬다. 워라밸을 꿈꾸는 제약회사 직원 몇몇이 자원해서 뇌 수술을 받는다. 출근을 하면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사이에 새로운 자아로 교체된다. 퇴근을 하면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원래 자아로 교체된다. 즉, 원래 나 자신은 출근해서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바로 내리고 곧바로 퇴근이다. 야, 이 얼마나 이상적인 워라밸인가!
일하는 자아는 어떻게 되는가
하지만 드라마는 지옥으로 떨어진 새로운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어떤 여자가 아무런 기억 없이 회의실에서 눈을 뜬다. 오늘이 첫 출근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자를 위로하면서 곧 익숙해 질거라고 한다. 팀장이라는 사람이 제일 사근거리지만, 여자가 보기엔 어쩐지 다들 미친 것 같다. 일하는 자아는 영원히 퇴근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다시 내려야 한다. 업무만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그녀는 바깥 자아에게 퇴사를 종용하거나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자해도 해 보고, 자살도 시도했다.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그녀는 체념한다.
드라마는 일터에 갇힌 자아들의 불합리함을 이질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자아를 ‘다 큰 아이들’ 로 분류해 두고 사회성 실험을 하는 것처럼. 하는 업무들이 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목표를 달성하면 보상으로 준다는 것들이 고작 케익 조각이나 댄스 파티, 크리스탈 장식품 따위이기 때문이다. 행여나 잘못을 하면, 휴게실로 들어가 ‘잘못했다’ 는 말을 거짓말 탐지기에 걸리지 않을 때 까지 반복해야 한다. 제약회사의 창립자를 마치 신처럼 받들어 기리는 장소, 그의 말을 정리한 책이 마치 성경처럼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세뇌작업처럼 보인다.
일터와 현실의 대비
요약글을 읽었을 때는, 업무의 굴레에 처음 떨어진 그 여자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드라마는 그녀를 보듬어주던 팀장이 진짜 주인공이다. 회사 안은 물론이고, 퇴근 후의 자아까지 가장 많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왜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진짜배기는, 본래 자아는 사회에 절어 있는 푸석한 모습이라면 새로운 일하는 자아는 매우 밝고 당차다는 것이다. 그 대비가 극명해서 몇몇 배우들의 1인 2역은 필수 요소일 수 밖에 없었다.결론적으로는 정말로 잘 했다고 본다.
분리된 두 무대의 배경 또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일터는 하얀색 바탕에 형광등, 텅 빈 공간에 80년대에나 볼법한 컴퓨터 콘솔이 파티션 사이에 놓여있다. 복도는 도대체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정표 없이 하얗기만 하다. 반대로 바깥은 만년설이라도 내린 듯 소복히 눈 쌓인 도시, 우중충한 거리, 해가 빨리 떨어져버린 어두운 밤을 강조한다. 이 대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이 우울한 이유는 바로 이 극야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낮에는 내가 없으니까.
공고할 것만 같은 워라밸 시스템은, 비밀을 간직한 전 팀원이 팀장 (정확히는 팀장의 본래 자아) 의 눈 앞에 나타나면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터의 자아들은 의심의 싹을 키우기 시작하고, 그걸 무마해야만 하는 관리팀 직원들과 대치하게 된다. 여긴 어떤 공간일까, 우리 말고 다른 팀이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방이 있을지, 자아를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나는 바깥에서 어떤 사람인지 같은 질문을 하나씩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하나씩 풀어내게 된다.
사실 중간에 들어온 그 여자가 그 균열을 확장한 것이다. 체념한 듯 해 보였지만, 팀원들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는-
나머지는 시즌2가 나와야 한다. 떡밥 회수가 절반도 안 되었다. 추후 전개나 결말이 어떻게 되건, 너무나 신선한 소재이기에 차기 시즌 소식에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내 자아는 일하러 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