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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김정운 교수가 말하는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교수가 쓴 에세이로, 부제는 “슈필라움의 심리학” 이다. 슈필라움 (Spielraum) 은 독일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리적/심리적 공간’ 을 뜻한다. 전라남도 여수에서 작업실을 차려, 그 슈필라움 속에서 겪었던 경험이나 떠올랐던 생각들을 엮은 것이다.

그의 슈필라움은 여수에 있다

작가는 교수 일을 그만두고 미술을 공부하러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한 화가의 작업실에 반해, 자신도 여수에서 전망 좋은 곳에 화실을 임대했다. 그러다 문득, 여자도(汝自島) 라는 섬에 위치한 사용하지 않는 미역창고를 사서 리모델링 해 서재가 있는 작업실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바닷가에 있어 책 보관이 힘들 것이다, 물이 들어차면 어떡하냐, 섬에서 대공사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갖가지 반대가 쏟아졌지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그 만의 슈필라움을 구축하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는 2층에 화실을 두고 있는 화가이자 조그만 배를 몰 수 있는 선장이면서, 해안가에 책이 가득한 작업실을 가진 작가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마냥 부럽기만 하다.

작가의 독서론

작가는 이 곳에서 좋은 책을 하나씩 채워가며 살고 싶다고 했다. 다 본 책을 꽂는게 아니라, 볼 책을 꽂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독서라는 것은, 여러 책을 묶어서 읽어야지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것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만 하면 된다고 한다. 발췌독을 해서 좋은 책은 곁에 두고 다른 책과 엮어가며 같이 읽는 것이다. 좋은 책은, 읽을수록 다른 책들이 떠오르고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으로는 ‘새끼를 치는 책’ 이라고.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올라오는 것이 많은 책이라고. 그게 다른 책이건, 생각이건 간에 말이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결코 낭비가 아님을 강조한다. 비싼 그림 한 점 살 돈으로, 책을 여러권 사서 책장을 장식하는게 더 지적으로 풍부해 보이고 저렴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행의 목적이 좋은 책을 찾고 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책에 진심인 사람이다. 그가 고백하기로, 독일과 일본 유학으로 언어에 제약이 적다 보니 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에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그렇다, 이런 이유로라도 나는 영어 하나만큼은 정말 편안하게 쓸 수 있도록 공부해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 이야기

심리학 교수인 만큼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심리학 관련 내용이 붙어 있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만 적는다.

  • 평생 즐겨 듣게 되는 노래들은, 20대 전후로 형성된다는 연구가 있다. 김조한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걱정을 문장으로 풀어내서 가나다순으로 정렬하면, 걱정이 걱정이 아니게 된단다. 걱정의 개념화!
  •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의사소통에서는 순서 주고받기가 중요한데, 내 순서를 뺏기면 인간은 은연중에라도 분노할 수 밖에 없다.
  •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원시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더 잘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니, 되도록 나쁜 이야기를 피해 다니자.
  • 나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은, 타인의 반응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다. 정 불안하면,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것에서 출발한 ‘예술’ 을 즐겨라. 미술관에 가거나 음악회를 가 보라.
  • 페이스북 창립 멤버가 고백하기를, ‘좋아요’ 로 이어지는 시스템은 마치 술이나 도박같이 ‘도파민에 의한 단기 피드백’ 의 올가미가 되었다고 한다. 인정 투쟁의 아주 쉽고 정량적인 결과물이다. 좋아요 개수로 인정받는 세상.
  • 자연인이 인기가 좋은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불 피우는 자유, 시선의 자유 때문이다. 남 눈치 안 봐도 되는 자유, 높은 데서 먼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자유.

책을 다 읽고 여전히 부러운 마음이 떠나진 않았지만, 나 역시도 슈필라움이 아주 없진 않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재택근무를 핑계로 온전히 내가 쓸 수 있는 방이 있다. 피아노도 있고 책장도 있고 게임기도 있다. 아침에는 커피를 내리는 조그만 공간도 있고, 베란다에는 철봉과 작은 운동기구 그리고 이따금씩 물을 주는 화분들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원래부터 내가 이사오면서 조건을 내 걸긴 했지만, 이 책을 읽고는 지금 내 방이 꼭 필요했다는 걸 지지받은 기분이 들었다.

발췌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작가처럼 많은 책을 내 곁에 두고 돌려가며 읽어야 한다. 나는 아직 좋은 책을 찾는 선문안(選文眼) 이 부족하다 느껴져서 책을 많이 사진 않았는데, 내년부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취미생활 비용을 책 구입에 써 보는 것도 재밌겠단 생각을 했다. 주변인 중에 책 사는 것 자체를 취미로 하는 사람도 있고, 스팀 라이브러리를 채우기 위해 게임을 구매한다는 것보다는 훨씬 고상해 보이니까 (…)

오늘은 지금의 걱정거리를 일기에 죽 늘어놓고, 하나씩 ‘별거 아니네’ 라는 코멘트를 달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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