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일기를 들추다, 너무나 빨리 읽어버린 소설 한 권이 생각났다. 천만관중의 스포츠라 입이 아픈, 그렇다고 어린이 야구단을 했다거나 골수팬은 아니어서 어떤 부심을 부리기도 뭣한 야구 소설. 실상은 야구라는 탈만 썼지, 현실이라는 룰 속에서 낙오된 주인공들의 이야기. 불펜의 시간.
정말 너무나 빨리 읽어버렸다. 내용이 적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재밌어서였다. 괜히 문학상 수상작이 아니었나보다.
유소년시절 그저 그런 야구선수였지만 지금은 회사원으로 일하는 준삼, 그와 같이 야구를 하던 리그 탑급 투수였지만 프로 데뷔 후 타이트한 상황에서는 경기를 망쳐버리는 이상한 투수 혁오, 여자 프로 야구 선수를 꿈꿨지만 스포츠지 기자로 살아가는 기현. 혁오의 이상한 게임 운영은 기현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사연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준삼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야구는 자세로 하는 거야. 자세가 완벽하면 좋은 공이 나올 수밖에 없어. 저렇게 완벽한 자세로 볼넷을 던진다는 건 말이 안 돼. 일부러 던진 게 분명해.
보이는 규칙, 보이지 않는 규칙
스포츠는 경쟁이다. 사회는 경쟁이다. 경쟁에는 룰이 존재한다. 그 룰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룰 바깥에서 일어나는 오리의 물갈퀴질을 아는 척 모르는 척 할 뿐이다. 승부조작, 뇌물, 뒷담화. 남을 깎고 나를 세운다.
세 명은 나름의 규칙을 지켜가며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숨겨진 규칙들을 깨닫고는 큰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아예 몰랐거나 쉬이 무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직에서의 경쟁, 나와 팀의 충돌, 성차별적 요소.
지킬거 잘 지키면 안 건드린다 는 주말 행보관의 말이 모포자락 먼지만큼 가볍게 펄럭이듯.
현실에서도, 선수가 못 하면 승부조작했냐고 비이냥 거리잖나. 마음 나쁘게 먹은 선수들에게는 그게 또 다른 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야구라는 승패와 전혀 상관없는 것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따끔히 선을 긋는다. 팬을 내쫓는 가장 빠른 방법, 기만질이나 다름 없다면서 말이다.
야구 팬이라면 더욱 재밌을 것들
탈을 썼다 한 들, 이 소설은 야구 선수였고 야구 선수인 인물들의 이야기다. 볼넷을 주는게 뭐가 나쁘냐, 무사 1,2 루라는 말조차 무슨 뜻인지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다. 반대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지명이 나오지 않지만, 준삼과 혁오가 같이 다니던 지역은 대구일 가능성이 높다. 준삼의 아버지와 함께 들렀던 야구장이 대구시민구장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풍경 끝에 마주한 시민 야구장은 TV로 봤던 것보다 아담하고 소박했다. 외벽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고, 금이 가서 임시로 때운 흔적도 눈에 띄었다. 준삼은 약간 실망했지만, 시민 야구장이 전국에서 제일 낡았다는 친구의 말에 아는 체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기도 했다.
홈런? 삼진?
그래서 세 명은 갖은 시련을 이겨내고 홈런을 쳤을까? 아니면 거대한 세상에 압도당해 삼진을 당할까? 이 소설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례다. 하나 확실한 것은,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세명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거대한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운다. 보이지 않는 룰에서 밀려난 사람들, 그래서 똘똘 뭉쳐서 멀리 우리를 던진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우리는 그렇다. 원하는 바가 멀어 보여도, 우리가 작아 보여도, 사람들은 마음 단단히 던진다.
새롬이 천천히 말했다.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만들고 싶어 해. 작아도 단단한 거,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거. 네가 한 말은 그래서 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