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2017)

신세계 이후로 박훈정 감독의 작품이 3편 나온 것으로 안다. 「대호」, 「마녀」, 그리고 「V.I.P.」  이다. 대호는 시놉시스부터 끌리지 않아서 앞으로도 안 볼 생각이고, 나머지 두 편은 시간이 난 김에 몰아서 봤다. (그래서 다음 리뷰는 마녀를 할 것이다.)

박훈정 감독이 각본에만 참여한 다른 두 영화에서 느꼈던 것과 달리, 각본/감독을 병행한 이후에는 찰진 대사도 줄어들고 스토리도 힘이 점점 빠지는 것 같아 보인다. 여기서 「악마를 보았다」 가 얼마나 잔인했니, 「부당거래」 와 「신세계」가 가지는 힘은 어디서 있는지를 다 이야기하는 건 주제를 많이 벗어나지만, 오늘 이야기할 「V.I.P.」 와 비교될 선배격 작품들로 써먹을 예정이다.

※ 대놓고 언급하진 않겠지만, 스포일러가 소량 있을 수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논란이 될 만한 악행

사실 여성 범죄는 「악마를 보았다」 에서도 나온다. 규모는 작지만, 디테일은 더 끔찍하다. 하지만 그 때는 조용하고 지금은 왜 시끄러웠냐고? 악인으로 분한 배우가 최민식이 아니라 이종석이어서, 라고 이야기하는건 아니다. 전자의 묘사가 필요했다고 느껴진다면, 여기서는 낭비했기 때문에 논란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필모그래피 동일 선상에 있는 다른 악행을 보면, 설명에 군더더기가 작다. 수현은 자신의 아내를 강간살해한 악마같은 놈에게 가하는 폭력과, 의혹의 소용돌이에서 범인을 조작한 조폭과 경찰이 빠져나오려 하는 발버둥과, 권력 다툼에서 의리와 자기보전을 해야 하는 정청의 선택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세 영화에 모두 장황한 설명은 없다. 그나마 가장 많다고 생각하는게 「악마를 보았다」 정도이고, 나머지는 씬 몇 개로 주인공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김광일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너무 많이 설명하고, 이제 그만 됐다고 하는데도 너무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이 정도 잔인해야 리대범이 탈북해서 잡아 죽이려고 하고 채이도가 꼭 잡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리대범은 어차피 복권해야 하는 명분이 있었고 국내 범죄만 규모로 설명했어도 채이도 역시 명분을 줄 수 있었다.

감독이 노린 건 김광일의 약점을 노출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마저도 어차피 극 중반에 언급될 것이였다. 김광일이 분노할 수 있는 유일한 포인트로 대비되기 때문에, 그렇게 초반을 롱테이크로 관객 고문을 했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일단, 스토리

강간 살해 묘사를 하는 것은 어차피 전례 (?)를 밟은 영화가 있어서 사실상 깔 거리는 못 된다. 그냥 보기 역해서 그런 것 뿐이다. 만약 이것 ‘만’ 문제였다면 어차피 상관없었다.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은, 이런 또라이 김광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따라  CIA (피터 스토메어, 폴 그레이 役), 국정원 (장동건, 박재혁 役), 대한민국 경찰 (김명민, 채이도 役), 북한 보위부 (박희순, 리대범 役) 의 눈치게임을 열심히 하다가, 점점 악행 자체에 초점이 모이는 것이었다. 영화는 여기서 실패했다.

김광일이 저렇게 미친 짓을 하고 다녀도 눈감아주는 것은, 장성택의 계좌를 관리하는 간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눈감아주고, 되려 수사를 지휘하던 리대범을 좌천시켜버린다. 그런데 갑자기 장성택이 실권되면서 김광일은 북한 밖으로 탈출하게 되는데, 이걸 CIA 에서 ‘국정원이 보호하고 있으라’ 고 했고 박재혁의 선배 (박성웅 扮) 이 관리하면서 국내에서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는 전개다.

국정원이 몰랐다면 한심한거고, 국정원이 알았다면 도덕적 해이다. 숨은 묘사에서는 국정원 관리팀 여직원도 당했다는 말도 있다. 아마도 김광일이 악인일 줄 몰라서 데려왔는데 사건이 터졌고, 자기 얼굴에 똥칠하기 싫어서 적당히 수습하고 나몰라라 했다고 추측해야 맞겠다. 이런 추측이 스토리 라인에 별로 도움도 안 되고, 설명을 해 줘도 똑같은 취급 당했을 테다.

김광일이 비호를 받는 이유를, 북한의 권력 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도 관객들에게 불친절하다. 총 4단계인데, 적고 보니 스포일러라 못 적겠다. 이 과정을 이야기해주는 포인트가 존재하긴 하지만, 굉장히 빠르게 지나간다. 북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장성택이 뭐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김광일을 가지고 배구놀이를 하는 이유가 부실해진다. 결국 남는 명분은 돈(계좌)인데, 이 맥거핀이 결말에 가면 힘이 엄청 떨어진다. 이젠 그런거 다 소용없다고 관객이 이미 느껴버리니까, 엔딩이 전혀 와닿지 않는 것이다.

박재혁도 그렇지만, 채이도와 리대범은 더욱 개성없는 캐릭터로 전락했다. 채이도는 계속 욕만 하고 범인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전진만 한다. 뭐? 못하는게 어딨어, 범인 잡아와. 뭐? 북에서 왔어? 탈북자 꺼져. 뭐? 수사거래? 니들 지금 장난하냐. 죽은 수사반장과의 연민이나 하다못해 안타까운 과거사를 끼웠어도 극적이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김광일에게 죽을 뻔 한 리대범이 차라리 낫지만, 왜 그렇게 쫓았는지에 대한 건 역시 별로 없다.

감독의 시나리오는 각 인물을 설명하는 챕터가 별개로 있는데, 영화에 넣기 너무 길어서 제외했다고 한다. 채이도와 리대범은 추가 설명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는데, 놓친게 아쉽다.

반대로, 피해자 또는 유족에게는 냉혈한인 사람들이 이해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너무 정을 나누기 때문에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평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이 없더라도, 무드는 충분히 깔렸다. 리대범은 사실상 당이 쫒지 마라면 하지 말아야 되는데, 피칠갑이 된 일가를 보고는 수사 의지를 내비친다. 너무 잔인하니까. 채이도 역시 ‘미국에는 사람 안 사냐’ 며 추가 범죄를 우려한다. 박재혁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히려 세 명의 처지들이 너무 박해서 (복권을 바라는 탈북자, 수습을 원하는 풍전등화의 국정원 요원, 극한 사명감에 시달리는 욕쟁이 형사) 앞만 보고 뛰어가도 모자라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그 같은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이었으니 사고가 났을 때 더 와닿은 것 뿐이다. 그 감정이 주입되는 순간 영화의 장르가 달라진다.

연기는?

그래도 장르적인 영화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건, 나는 스토리가 말이 되면 영화나 드라마가 지루해지니까 적당히 상상해서 맞춰 봐야한다 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영화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에 네임드 배우들의 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토리가 연기 폭을 좁혔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으니 넘어가고.

가장 눈여겨 본 사람은 장동건과 이종석인데, 장동건은 불안해서, 이종석은 호기심으로 본 것 같다. 내가 일전에 「우는 남자」 리뷰를 하면서 왜 이렇게 찌질남처럼 연기했냐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뒤에 「신사의 품격」 을 보면 아, 이 아저씨는 차도남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드라마에는 귀여운 구석이 참으로 많았으나, 기본 베이스는 쿨내나는 도시남자였잖나) 그런 표현이 이번 영화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어 갈 때엔 빛을 발하고, 대립관계에서 짜져 있거나 물론 잘 봐줘서.. 그렇단 이야기고, 기대 이상이라고만 하자.

이종석의 경우는 ‘아니 이 친구가 북한 사투리를? 악역으로?’ 라고 놀랬기 때문이다. 실제 대사는 채이도와 첫 대질심문할 때 나와서 인내심을 갖고 그의 입을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거슬리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포스터에도 보이지만, 저 빙긋이 웃는 미소가 여심을 흔들 수도 있고 세 남자를 빡돌게 만들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줬다. 무엇보다, 「너의 목소리가 보여」 전후로 시작된 이종석 특유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으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 하지만 성공적이었는지는 글쎄.

평가

생각없이 본다면 큰 불만이 없는 영화지만, 찾아볼 정도로 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정원이나 경찰이 서로 잇속을 챙기려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신선하다고 느끼거나, 이종석의 연기가 궁금하다면 볼 정도고, 나머지는 사실상 평범했거나 기대에 못 미쳤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소위 말하는 ‘망작’ 수준은 절대 아니다. 그냥 내 기대가 높았을 뿐.

★★★☆